LDA(Latent Dirichlet Allocation)


매번 공부해야지 했던 LDA
결국 논문을 읽진 않고 간단하게 개념만 학습하기 위하여 인터넷으로 찾아봤다.
대충 토픽 클러스터링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어쨌든 이번 기회에 조금 더 잘 알게 된 것 같다.

LDA는 간단히 말하면 Unsupervised generative topic model. 문서를 모델링하는 기법이다.
문서 컬렉션(corpus)을 표현하는 방법을 generative한 방법으로 찾는 것이며, 주제 분류나 문서간 유사도 계산에 많이 쓰인다.

LDA는 각각의 문서를 토픽들의 집합으로 본다는 것이 특징.
즉, document는 mixture of topics.

<LDA 모델>

LDA가 문서를 모델링하는 방법:
1. 문서의 토픽들을 정하고
2. 각 단어의 토픽을 정하며
3. 토픽을 형성하는 단어의 집합에서 단어를 뽑아 문서에 쓴다.



참고한 블로그:

http://www.4four.us/article/2010/11/latent-dirichlet-allocation-simply

http://arongdari.tistory.com/entry/Latent-Dirichlet-Allocation

Seq2seq가 내가 하려는 연구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직접 짜지는 않고..... 

있는 코드 돌려보기로 했다.


https://github.com/macournoyer/neuralconvo


코드는 torch 코드



그리고 겪게 되는 에러들 포스팅


1. 

/home/xx/torch/install/share/lua/5.1/nn/Select.lua:10: bad argument #3 to 'select' (out of range at /tmp/luarocks_cutorch-scm-1-5327/cutorch/lib/THC/generic/THCTensor.c:386)


흠.. 잘은 모르겠지만 Select.lua의 10번째 줄에서 에러가 나는 것 같다.


https://github.com/torch/nn/blob/master/Select.lua



근데 웹에 나온 Select.lua랑 코드가 달랐다.


local Select, parent = torch.class('nn.Select', 'nn.Module')

function Select:__init(dimension,index)
   parent.__init(self)
   self.dimension = dimension
   self.index = index 
end

function Select:updateOutput(input)
   local index = self.index < 0 and input:size(self.dimension) + self.index + 1 or self.index
   local output = input:select(self.dimension, index);
   self.output:resizeAs(output)
   return self.output:copy(output)
end

function Select:updateGradInput(input, gradOutput)
   local index = self.index < 0 and input:size(self.dimension) + self.index + 1 or self.index
   self.gradInput:resizeAs(input)  
   self.gradInput:zero()
   self.gradInput:select(self.dimension,index):copy(gradOutput) 
   return self.gradInput
end 

여기서 


local index = self.index < 0 and input:size(self.dimension) + self.index + 1 or self.index

이 부분의 코드가 없고, 대신 select에 인자로 주는 index가 local index가 아니고 self.index



사실 여기가 문제란 걸 발견한 건,

우선 이 값을 찍어봐야 할 것 같아서

self.dimension과 self.index를 찍어봤다.


각각 1과 -1의 값이 나오길래, 왠지 -1이 index이면 안 될 것 같아서 ㅋㅋㅋㅋ

그래서 저 없는 줄을 넣었더니 문제 해결.


nn 패키지를 업데이트를 안 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우선 대충 해결데쓰! 


"그 남자애는 널 좋아해서 괴롭히는 거야"는 말이 얼마나 위험천만한지 보여주는 호주의 공익광고(동영상)



각 장면 한국어로 설명 ▶ http://www.huffingtonpost.kr/2016/05/27/story_n_10159466.html


동영상 ▼



매번 까먹는다...

이젠 정말 안 까먹을 수 있을듯!


링크 ▶ http://langrang.tistory.com/14

(미완성)


p.26

이러한 시각은 같은 가정 내 폭력인 아동 학대를 한 "인간"의 미래를 짓밟는 행동, 노인 학대를 미래의 "자신"을 학대하는 것으로 접근하는 것과 확연히 구분된다. 이는 대다수 가정 폭력 연구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점인데, 아동/노인 학대는 피해자 개인의 권리 침해로 이해되지만, "아내 폭력"은 여성의 인권보다는 가족 해체에 대한 우려가 더 우선시된다. 그래서 아동/노인 학대는 사회의 즉각적인 개입이 강조되지만 "아내 폭력"은 부부간의 심리적인 문제로 경시되면서 "비바람은 집안에 들어가도 법은 집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논리가 강조된다.


p.27

만일 어떤 사람이 가정이 아닌 길거리에서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폭력을 당했다면, 당연히 가해자를 처벌해야지 치료하거나 상담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아내 폭력"이 전쟁, 고문, 조직 폭력 등 일반적인 폭력과 다른 것은 그것이 단지 "가정"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행사한다는 점이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은폐, 지속되었다고 볼수 있는데 바로 이 부분을 지적, 비판하지 않는다면 "아내 폭력"을 근절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히려 성(차)별 제도에 의한 가족 내 남녀의 차별적 지위와 그에 따른 성 역할 규범은 그대로 둔 채 폭력만을 방지하자는 기존의 담론인 가족 중심적 접근이야말로 "실질적인" 대책이 되기 어렵다고 본다.


p.35

미국에서 살해당한 여성의 약 42%는 이전 또는 현재의 파트너에 의해 죽은 것이다. 방글라데시, 브라질, 케냐, 태국은 50%를 육박하며 파키스탄에서는 전통적인 여성 억압 문화인 퍼다의 영향으로 80% 정도의 여성이 남편으로부터 학대받는다. 볼리비아 정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매해 10만 건 정도 행해지고 95%는 처벌되지 않는다고 보고하였다. 미국에서 아내 구타는 강간, 자동차 사고, 강도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외상의 이유이며 여성이 다치는 가장 일반적인 원인이라고 여겨진다. "아내 폭력" 경험률 조사(1986-1993)에 의하면 칠레/에콰도르/스리랑카/탄자니아 60%, 일본 59%, 과테말라 49%, 우간다 46%, 케냐 42%, 벨지움 41%, 잠비아 40%, 말레이시아 39%, 캐나다 27-36%, 미국 28%, 노르웨이 25%, 네덜란드 21%에 이른다.


p.36

한국사회에서도 "아내 폭력" 발생률은 거의 대부분의 조사에서 과반수를 넘고 있으며, 구체적인 폭력 피해 상황은 다른 사회의 사례와 별로 다르지 않다.

(테이블 추가)


pp.52-53

청자가 화자의 경험을 믿을 수 없다는 점은, 말하는 자가 사회적 타자이거나 그의 고통이 정치적 금기일 때 더욱 극대화된다. 폭력을 당한 아내의 고통은 한국 사회 구조에서는 부정되어야 한다. "매맞은" 아내들이 고통을 표현하는 행위는, 그들의 고통에 의해 유지되어 왔던 가부장제 가족 제도의 효율적 작동을 위협한다. 그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안식처 가족의 신화, 보호자 남성의 신화가 무너지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고통 경험은 평등하지 않다. 어떤 고통의 경험자들은 존경받지만, 어떤 고통의 경험자들은 "더럽다"고 추방되고 낙인 찍힌다. "아내 폭력"은 인정되지 않는 고통, 믿을 수 없는 고통이다. "정치적"이고 공적인 장에서 인정되는 고통과 달리 재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지 못한 타자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는 폭력당하는 여성들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담론 구조도, 청자들의 공동체도 없다. 그들의 고통은 가족의 문제가 되거나, 자녀의 고통이 강조될 때만 부수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그래서 고통을 인내하는 여성들의 능력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왔고, 그들은 자시느이 고통을 표현하는 것 자체에 죄의식을 느낀다. ("나는 왜 참을성이 없을까?")

피해 여성들은 "이런 얘기를 누가 믿겠냐"며 말하는 고통 못지않는 의심받는 고통을 호소했다. 나는 나대로 "이 이야기들을 쓴다면 사람들이 믿을까"를 걱정했다. 피해 여성은 "분명히" 맞았지만 자신의 경험을 의심했고, 나 역시 "분명히" 들었지만 나의 경험을 의심했다. 여성의 경험을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그것을 제3자 혹은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여성의 경험이 있는 그대로 "객관성", "진실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권력 구조의 산물이다.


p.54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수없이 겪다시피, 남성들의 경험은 보편적인 경험으로 다뤄지지만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의 경험은 언제나 특수한 문제가 된다. 여성주의 지식 생산에서 여성의 경험 드러내기가 중요한 이유는 경험 자체가 이론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의 경험이 인간사의 "보편적"인 문제로 보이지 않게 하는 권력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여성의 경험을 드러내는 과정 자체에 이미 그러한사회적 힘이 개입해 있는 것이다.


p.80

남녀의 성 활동이 성별화(gendered)되어 있다는 것은 성기 노출과 "스트립 쇼"의 예처럼, 이성의 몸에 대한 경험이 성별에 따라 여성에게는 당하는 폭력으로 남성에게는 돈을 내고 구입할 수 있는 쾌락으로 인식되는 바로 그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권력 관계를 의미한다. 많은 사회에서 남성성의 정의는 성적인 정복과 폭력으로 나타난다. 


p.94

"아내 폭력"은 아내가 폭력을 유발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성 역할에 충실, 집착함으로써 지속된다. "아내 폭력"은 가부장제의 기본 성격과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에 성매매와 더불어 가부장제 프로젝트의 최후 보루가 되고 있다.


p.117

남편의 성폭력은 "의무를 거부한 아내와의 부부 관계"로 해석된다. 가장인 남편은 집안의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데 아내의 몸은 그의 소유물 중에서 아주 핵심적인 것이다.


p.136

시집 식구들은 아내의 말대꾸와 남편의 폭력을 "양자가 똑같이 잘못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아내의 말대꾸(의사 표현)가 남편의 폭력을 "불러 왔기" 때문이다. 아내는 말을 한 것이 잘못이고, 남편은 때린 것이 잘못이다. 잘못의 내용이 아내와 남편에 따라 다른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는 폭력 상황의 통제력이 가해자인 남편에게 있지 않고 피해자인 아내에게 있게 된다. 아내의 행동 여하에 따라 남편은 가해자가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애교를 부리지 않는 아내는 남편을 가해자로 만드는 나쁜 여자가 된다. 말대꾸는 남편이 원한 아내 역할이 아니다. 말대꾸는 아내의 의사 표현, 자기 주장인데, 남편 입장에서 의사 표현이나 자기 주장은 남편(남성)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pp.137-138

애교는 아내가 남편을 중심으로 한 의사 표현이고, 말대꾸는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한 의사 표현이다. 말대꾸가 폭력의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은, 남편이 아내를 독립적인 사람으로 개인성(individuality)을 가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내는 남편이 원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일시적으로 폭력을 피할 수도 있기 때문에 폭력 발생 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아내의 "지혜로운" 태도로 인해 폭력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성별화된 폭력의 또다른 유형일 뿐 폭력과 비폭력을 구별할 수 있는 근본적인 차이는 아니다.

남편의 폭력 대 아내의 애교는 그것이 남녀에게 각기 다르게 할당된 성별적 의사 표현 방식이라는 점에서 같은 짝(pair)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내의 애교로 폭력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폭력 상황 대응에 있어 남편/아내 역할 규범의 성차별성은 지속되므로 그것이 폭력을 막는 근본적인 대책이 되기는 어렵다. 폭력 발생 상황에서 이러한 아내의 "역할"을 폭력의 "책임"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남편은 언제든지 아내를 때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151

그 동안 페미니스트들은 "생계 부양자 남성", "의존자 여성"은 통념일 뿐 실제로 가족을 부양하는 남성들은 매우 극소수라고 지적해 왔다. 여성이 경제력이 없기 때문에 폭력 가정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로 인해 폭력이 지속된다는 논의는 사실 여부를 떠나, 여전히 폭력의 원인과 책임을 아내에게 맞추는 것이다. 


p.170

피해 여성들이 "내 잘못으로 인해 맞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고통을 견딜 만한 가장 합당한 이유가 된다. 폭력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으면 원인 제거도 자신이 할 수 있기 때문에, 피해 아내는 남편의 폭력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갈등 상황에 직면했을 때 대응하는 익숙한 방식이기도 하다. 남성은 문제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지만 여성은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크다. 투사로 인한 분노가 남성의 질병이라면, 내사(introjection) 시리는 여성적 질병인 우울증의 가장 큰 원인이다. 


p.174

남편의 폭력을 자신이 "맞을 짓"을 한 결과라고 보는 것은, 일시적으로 아내의 고통을 덜어주고 결혼 생활에 적응하게 한다. 그러나 폭력의 주체는 남편이기 때문에 폭력 행동은 남편만이 고칠 수 있다. 아내가 남편의 폭력 행위를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은, 남성 중심의 가족 구조에서 아내의 역할에 대한 극단적인 자기 해석이다. 



p.182

남편과 아내는 미분화된 하나의 자아로서 각자는 서로의 연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편의 잘못은 곧 아내의 잘못이 된다. 이러한 부부 관계의 공의존(co-dependency)적, 공생적 성격 때문에 사람들은 남편이 잘못하(되)면 아내를 비난한다. 그래서 다른 종류의 폭력과 다르게 "아내 폭력"에 있어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폭력 의지를 조절, 교정할 수 있다고 믿으며 심지어 아내는 남편이 폭력을 "쓸 수밖에 없는" 심정과 상황까지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때 동정과 지원을 받아야 할 "불쌍한" 사람은 피해 여성이 아니라 가해 남편이다. 


p.183

자신을 구타하는 남편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심리는 폭력의 정도가 심한 경우일수록 자주 발견된다. 실제 남편과 폭력을 "주고받고" 싸우거나 갈등 과정을 거쳤을 때는 남편을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남편이 폭력의 이유도 제대로 대지 못할 만큼 형편없이 나오거나 거의 무너지는 모습을 보일 때 아내는 남편이 망가졌고 불쌍하다고 느낀다. 

이때 아내는 폭력 상황 "여기, 지금"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아내는 폭력 상황에서 최우선으로 배려받아야 할 사람으로서 자신을 잊고 상황을 초월한 사람이 된다. "배려의 화신"인 폭력당하는 아내는 정작 자신은 배려하는 대상에서 제외한다. 그래서 자신은 생명을 위협 당하는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가해자에게 연민의 감정을 가진다. 이들이 폭력에 적응하기 위해 선택한 극도의 자제, 자기 조절, 자기 비판, 자기 처벌의 심리는 남편을 위해 자신을 희생물로 삼은 것이다.


p.185

남편은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아내는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한다. 정신 분석학자 에릭 번은 그의 교류 분석 이론에서 이와 같은 의사 소통 방식을 부모/어른/아이의 방식으로 설명한다. 같은 수준에서 대화가 이루어져야 갈등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상대방과의 관계는 힘의 원리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데 아내들은 사랑의 원리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여성의 의도와는 반대로 관계는 더 나빠지고 여성은 더욱 상처받는다.


p.188

딸은 엄마를 살리기 위해 애원과 "뽀뽀" 세례로 가해자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한다. 여자 어린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남자) 어른의 비위를 맞추고 애교 부리고 귀여움을 받으면서 여성다운 성적 태도를 학습한다. 이 사례는 몇년 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아버지의 어머니 구타와 의붓딸 성폭행 사건과 연장선상에 있다. 그 사건에서도 딸의 성적 서비스는 자신과 어머니를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다소나마 보호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제였다. 애교와 모성성, 여성적인 섹슈얼리티의 혼재는 "성애화된 보살핌의 노동"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어쩌면 폭력 남편이 가장 바라는 아내의 역할일지도 모른다.


p.194

위 여성은 자녀가 대학 가기 전까지는 "정상적인"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혼 여부를 놓고 3년을 버틸까 말까를 고민한다. 남편의 폭력이 이혼보다 더 비교육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자신은 맞을지라도 자녀를 위해서 폭력을 견뎌야 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과 "어머니"로서의 여성이 양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인간은 누구나 최소한 맞지 않고 살 권리가 있지만 여성이 "어머니"가 될 때 그것은 당연히 유보, 포기된다. 그들에겐 "인간의 권리"보다 "어머니로서의 도리"가 더 중요한 가치이고, 또 가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p.203

여성은 결혼을 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성별 권력 관계에 편입되고 고통을 당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결혼은 여성들에게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사회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권리이자 신분이다. 그래서 폭력 남편이라 할지라도 남편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울타리 밖으로 나오는" 위험하고도 고통스런 과정이다. 


p.214

남편이 폭력을 행사할 때 아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대응한다. 무조건 빌기도 하고 도망가거나 소리 지르기, 꼬집기, 할퀴기와 같은 "여성적"인 방법으로 맞선다. 그러나 아내의 방어는 종종 "공격"으로 의미화된다. 이 논의는 "아내 폭력"이 사회적 이슈가 될 때 언제나 동반되는 담론인 "매맞는 남편"의 존재와 연결된다. 특히 "아내 폭력" 피해자의 가해자 살해 사건이 발생할 때 이 문제는 첨예한 쟁점이 된다. 아내는 덜 맞기 위해 남편에게 저항하는데 이때 폭력 남편은 자기는 안 때렸는데 ("남편의 역할을 했을 뿐인데") 아내는 자신을 때렸다고 생각하므로 가해자는 아내가 된다.


p.216

한국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은 폭력에 다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일반적으로 폭력은 남성의 본능, 전유물로 여겨진다. 성별에 따라 폭력 허용도가 다르기 때문에 아내의 방어는 정당 방위(fair fight)가아니라 남편에 대한 공격이 된다. 그러므로 "아내 폭력"에는 정당 방위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때 정당 방위는 남성 중심적 기준으로, 남편에게 저항한 아내는 "정당함"의 밖에 존재한다. 혹은 법정 종사자들이 폭력당하는 아내가 겪는 폭력의 심각성과 공포를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성들은 고통이나 폭력을 당했을 때 남성보다 훨씬 더 참을 것이 기대된다. "원래" 공격 성향이 강한 남성의 폭력 행위는 "우발적인 것"으로 해석되지만 여성이 "공격"했을 경우에는 미리 계획된 것, 즉 고의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쉽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법적으로 문화적으로 남성에 의해 "보호"되어야 하는 존재다. 자기 방어는 사회적 주체, 독립된 개인들이 할 수 있는 행위이지 타인의 보호를 받고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피보호자는 자기 방어 권리가 없다. 피보호자의 안전은 자신을 방어함으로써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보호자가 "보호"해 줌으로써 확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보호하는 남편에게 고마워하거나 복종하지 않고, 남편이 "가르치려고" 하는데 도리어 남편을 "때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이러한 담론에 따라 아내는 "맞으면서 보호받고" 있다. 


p.222

법정, 경찰서, 가족 앞에서 남편은 폭력 행위를 사과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가족의 유지를 위해 노력했는가를 증명한다. 그러한 노력을 아내가 인정하지 않으면 남편의 잘못과는 상관없이 "가정 파탄"의 책임은 여성에게 있게 된다. 남편의 폭력 행위가 가족 유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용서 여부가 가족 유지를 결정한다. 이는 "아내 폭력" 정도로는 가정이 해체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 즉 아내가 맞고 사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뜻한다. 가족의 유지를 위해 남편에게 요구되는 책임 수준은 "때리고 사과"하는 것이지만, 아내에게 요구되는 책임 수준은 "맞고 남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미완성)




비행공포 - 에리카 종



여성에 의해 쓰여진 한 여자의 이야기


책 소개가 참 재미있다.


「타임」 선정 1970년대를 지배한 도서 TOP10, 전세계에서 2700만 부가 판매된 전설의 베스트셀러, 한국어판 출간 당시 음란성을 이유로 지형(紙型)이 소각되는 수모를 겪었고 그 후로도 <날으는 것이 두렵다> <침대 밑 사나이> <꿈의 회의로부터의 보고> 등 다양한 한국어(해적)판이 출간된 문제작. 


네 번의 결혼과 거침없는 성적 상상 등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고스란히 담긴 소설, 작가 에리카 종을 페미니즘의 아이콘으로 만들고 가족과 의절하게 한, 그러나 이제는 미국 펭귄 출판사에서 40주년 기념 에디션을 제작하는 명실상부한 고전. 다양한 수식어마저 뜨거운 에리카 종의 소설 <비행공포>의 최초 한국어판이 도서출판 비채에서 출간되었다.


'여성은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라는 거대한 질문에 온몸으로 답한 주인공 이사도라의 '성적 모험담'은 4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당혹스럽고 생동감 넘친다. 2013년 올해로 한국 생활 24년을 맞은 서울여대 스티븐 캐프너 교수가 작품 해설을 맡았다.


출판사의 밑줄 긋기 ▶ http://www.aladin.co.kr/shop/common/wbook_talktalk.aspx?ISBN=1185014373&CommunityType=Underline



이 책, 완전 사랑함.

번역도 정말 매끄럽게 잘 되었다.

달리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수작이다- 라는 정도의 말밖에는.

아마 내가 여자라서 더 많이 공감하고 재밌게 느꼈을 것 같긴 하다.

에리카 종의 통찰이 몇 십 년이 지난 나에게도 참으로 날카롭게 다가온다.


페미니즘을 소설로 읽기.

아주 재밌는 소설로 읽기.

이런 느낌이랄까 :)


줄거리로만 이 소설을 설명하자면 한없이 빈약해진다.

이 소설은 어떠한 이야기의 흐름에 그 방점이 맞추어진 건 아닌 것 같다. (물론 그 이야기는 굉장히 중요하긴 하다. 한 여성의 자유를 향한 여정이니까.)

어떠한 사건사건들보다는 그 사건 안에서 소설의 주인공인 이사도라가 생각하는 것, 그것이 굉장히 재미있고 의미있다.


너무나도 인상깊은 구절이 많아서

공책에 베껴쓰다가 다 베껴쓰지 못해서 아쉽다.

꼭꼭 씹어서 내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책이다.




p.54

... 여자들이 책을 쓰기 전까지 세상에는 오직 한쪽의 이야기만이 존재했는데. 역사를 통틀어 모든 책들은 정액으로 쓰여졌다. 생리혈이 아니고. 스물 한 살이 될 때까지 나는 채털리 부인의 오르가슴을 기준으로 삼으면서 도대체 나는 어디가 잘못된 건가 의문을 품었다. 채털리 부인이 사실은 남자라는 사실을 그 땐 왜 몰랐는지. 채털리 부인은 사실 D.H.로런스였다.

→ 여자의 성(性)도 남자가 이야기한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바라는 성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 기이한 일. 그것을 아주 재밌게 써냈다. 사랑해요 에리카 종.


p.99

아기를 갖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자를 위해 아기를 갖는 건 부당하다. 그들의 이름을 가질 아기를 갖는 것,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이 늘 기쁘게 해주어야 할 남자를 위해 아기를 갖는 것,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봉사해야 하는 남자를 위해 날 구속할 아기를 갖는 건 부당하다. 사랑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족쇄다. 가장 아프고 가장 오래가는 족쇄다. 그 족쇄에 나는 영원히 갇힐 것이다. 나 자신의 감정과 내 아기의 인질이 될 것이다.

→ 최근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라는 책을 읽었다. '아내 폭력'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의 이 구절을 읽었던 나와 '아내 폭력'에 관한 책을 읽고 난 다음의 이 구절을 다시 읽게된 나는 다르다. 다른 점을 느낀다. 더 실제적으로 느껴진다. 아기를 향한 사랑이라는 족쇄가 나를 가둔다.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어떠한 부당한 일이 있더라도. 여성은 사회가 부여한 '아내'와 '어머니'라는 역을 감당하려고 한다. '여성'임을 포기하고 '인간'임을 포기하면서까지. 

→ 그리고 또 하나, 내가 낳는 아이가 내 이름을 갖지 못한다. 남자의 이름을 가진다. 나는 아기를 낳지만 아기는 나의 소유가 되지 않는다. 아이는 나의 이름을 갖지 않는다. 모든 고통을 감내하며 10달간 보듬고 조심하고 절제하고, 마지막에는 출산의 고통을 오롯이 떠안지만 아기는 나의 이름을 갖지 않는다. 그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재우고 돌보더라도 아기는 나의 이름을 갖지 않는다. 아이에게 나는 이방인이다. 아이에게 어머니는 이방인이다. 친(親)가가 아닌 외(外)가이다. 


p.143

오래전 트위스트가 유행했을 때 나는 그 춤을 제대로 추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신경 쓸 게 뭐가 있는가? 사교댄스라는 것은, 사교생활의 모든 것이 그렇듯, 뻔뻔함이 전부였다. 그때부터 나는 '춤 잘 추는 사람'이 되었다. 적어도 춤을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춤은 섹스와도 같았다. 리듬과 땀이 전부였다.

→ 춤에 대한 재밌는 관점. 아 매력적이야.


p.170

나는 계속 그의 ---를 빨았지만 그의 ---는 단단해졌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별로 하고 싶지 않네."

"왜요?"

"잘 모르겠어. 왠지 그러고 싶지가 않아요."

에이드리언은 그 자신이 사랑받기를 원했다. 그의 노란 머리카락 때문도 아니고 그의 분홍색 페니스 때문도 아닌 오직 그 자신의 모습으로. 그의 그런 생각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는 섹스머신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인상적인 에이드리언. 섹스에 환장하지 않는 에이드리언. 이사도라에게 자유를 향해 떠나도록 손을 내밀어준 에이드리언. 


pp.174-174

"가끔 이런 경우가 있었어요?"

"전혀 없었어요. 돌팔이 의사 아가씨, 더 심문당하고 싶지 않아요. 정말 이상하네. 이런 적 없었는데. 단지 당신의 멋진 엉덩이에 완전이 넋이 나가서 지금은 섹스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모욕은 드러누운 ---. 이성간의 전쟁의 최종 병기는 축 늘어진 ---. 적진의 깃발은 불완전한 발기. 종말의 상징은 자폭하는 핵탄두 ---. 그것이야말로 결코 바로잡을 수 없는 불평등이다. 남자가 ---라고 불리는 근사하고 매력적인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여자가 전천후 xx를 갖고 있다는 사실. 비바람도 진눈깨비도 밤의 어둠도 그것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그것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생각해보면 xx는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가. 그러고 보면 남자들이 여자들을 증오하는 것도 당연하다. 남자들이 여자의 불완전함에 관한 신화를 지어내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핀에 박히는 건 거부하겠어."

'핀에 박힌다'는 말이 나에게 무얼 연상시키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에이드리언이 말했다.

"나는 분류되기를 거부할 거야. 당신이 자리에 앉아 나에 관한 글을 쓴다고 해도 당신은 내가 영웅인지, 영웅이 아닌지, 개자식인지 성인인지 알 수 없을걸. 당신은 도저히 날 분류할 수 없을걸."

바로 그 순간, 나는 미친 듯이 그와 사랑에 빠졌다. 그의 축 늘어진 ---는 딱딱한 ---가 결코 닿을 수 없었던 곳에 닿아 있었다.

→ 내가 이 번역을 사랑하는 이유. 반말과 존댓말이 자연스레 오간다. 아주 귀여운 정도로.

가끔 그런 번역이 존재한다. 남자는 이유없이 반말을 하고 여자는 당연한 듯이 존댓말을 한다. 서로가 동등한 관계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오래 전에 산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있었다. 읽지 않은 채로 꽤 오래 갖고 있었다.

페미니즘을 접하게 된 뒤로 이 책이 읽고 싶지 않아졌다. 뻔한 내용일테지. 그래도 버리기 전 한 번 스르륵 훑어 보았다.

그리고 내 눈에 띄는 '아내-남편'의 대화. 그리고 그 번역된 말투. 

남편은 시종일관 '나는 그랬소 저랬소. 뭐뭐 했으면 좋겠소.' 여자는 늘 '그래요. 저래요. 이래저래 해요.'

역겹다.

깨끗한 그 상태로 그 책은 버려졌다. 

→ 여자들만이 갖고 있는 전천후 xx. 왠지 웃음이 나온다. 그냥 미소가 지어진다. 전천후 xx라니. 그런 식으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억울하다는 생각은 했지. '바기나 덴타타 (이빨 달린 질)'가 정말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나 하고. 이렇게 유쾌한 통찰이라니. 읽는 내내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소설. 완벽한 xx를 갖고 있는 나.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xx. 아, 정말 유쾌하다. 


pp.228-229

"무슨 생각해?"

그가 물었다.

"제대로 했다는 생각."

베넷에게도 언젠가 했던 말이었고, 지금보다는 그때가 훨씬 진실에 가까웠다.

"당신은 거짓말쟁이에 위선자야. 왜 거짓말을 하지? 내가 제대로 못했다는 거 나도 알고 있는데. 이것보단 훨씬 더 잘할 수 있어."

그의 솔직함이 당황스러웠다.

"맞아. 솔직히 시원치 않았어."

"훨씬 낫군. 당신은 왜 항상 빌어먹을 사회복지사가 되려 하지? 나의 에고를 지켜주려고?"

그는 에고를 '에그-오'로 발음했다.

나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도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나는 늘 남자는 그런 식으로 대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이 산산이 부서지거나 미쳐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또 한 명의 남자를 미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남자들의 에고는 너무 섬세해서 항상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것 같아."

"나의 에고는 그렇게 연약하지 않아. 제대로 못했다는 얘길 들어도 괜찮다고. 그게 엄연한 사실일 땐 더더욱."

"당신 같은 남자는 처음이라 그랬나봐."

그가 환하게 웃었다.

"당연히 처음이겠지. 아마 앞으로도 못 볼걸. 내가 영웅이 아니라고 말했지? 난 당신을 구원할 남자도 아니고 백마를 태워 멀리 데려갈 남자도 아니야."

→ 여기서도 이제 둘은 반말을 한다. 친밀감의 표현. 적절한 번역. 일방적으로 반말을 하지도 않는다. 이진 번역가님. 감사합니다. 

→ 남자들의 섬세한 에고. 여자들은 사회복지사가 되곤 한다. 남자들은 어떨 지 모르겠지만 여자들은 이 대목에 꽤나 공감할듯.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회적 가르침이 있었던 것 같다. 특히나 성에 대해선. 여자는 성에 대해 무지해야 하고 남자의 에고를 살려주기 위하여 만족한 척 해야 하지. 아 사이다.


pp.239-241

... 그러나 나의 마음은 온갖 모순으로 출렁거렸다. 내가 느끼는 이 모든 모순적 감정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때로는 대담해져서 지상에서의 짧은 삶을 사는 동안 내게 주어지는 모든 쾌락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행복한 쾌락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가? 그게 뭐가 잘못인가? 역사상 삶으로부터 (그리고 남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걸 얻어낸 여자들은 결국 가장많은 걸 요구한 여자들이었다. 고귀하고 매력 있는 여자처럼 행동하면 남자들도 고귀하고 매력 있는 여자로 대접하고, 발닦개가 되기를 거부하면 그 누구도 밟지 않는다. 비굴한 여자는 짓밟히고 여왕처럼 구는 여자는 여왕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그런 대범함이 잦아들고 나면 이내 쓸쓸함과 절망감에 휩싸였고 결국 두 남자 모두를 잃고 혼자 남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으며, 베넷에게 미안했고 정조를 지키지 못한 나 자신을 비난하면서 내가 저지른 모든행동을 경멸하게 되었다. 그럴 때면 베넷에게 달려가 용서해달라고 빌고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아 당장 그의 아이를 열둘 낳겠다고 말하고 (그와 나의 결속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그가 나의 안전을 보장해주기만 한다면 노예처럼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약속하고 싶어졌다. 고분고분하고 역겨울 정도로 달콤한 여자가 되겠노라고, 소위 '여성성'이라는 거짓말로 이 세상에 통용되고 있는 모든 것들의 결정체가 되겠노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말이 되지 않았고 나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지배하는 것도 지배당하는 것도, 못된 여자도 노예도, 둘 다 덫이었다. 그 두 가지 모두 결국은 내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외로움으로 나를 이끌 뿐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스스로를 증오하면 자신을 증오하는 나를 또다시 증오하게 되었다. 그리고 절망했다.

→ 


p.242

문득 나는 가방을 챙겨 두 사람 모두에게서 떠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둘 중 한 명을 선택하는 대신 그들 두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하는 건 아닐까? 두 사람에게서 벗어나 내가 나를 보호해야 하는 건 아닐까? 이 남자에서 달아나 저 남자에게로 가는 식이 아니라 한 번이라도 혼자 힘으로 살아 보는 것. 그게 왜 이토록 두려울까?

→ 


p.250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은 원하는 걸 뭐든지 가질 수 있는데 그걸 모르고 있단 거야. 온 세상을 손에 쥘 수 있는 데도 그걸 몰라. 나와 함께 가면 베넷이 별로 그립지 않을걸. 나하고 여행을 떠나는 거야. 나는 유럽을 발견하고 당신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p.252-253

에이드리언이 웃으며 내 엉덩이를 애무했다. 그것만큼은 난해하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전체대상'이었다. 1과 2분의 1이었다. 에이드리언과 함께 있을 때면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내 엉덩이가 만족스러웠다. 제발 남자들이 알았으면. 여자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못생겼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예쁜 여자들조차도.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남자는 돈 조반니보다 더 많은 여자들과 섹스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들은 모두 자기 xx가 못생겼다고 생각한다. 엉덩이는 너무 크고 가슴은 너무 작고 허벅다리와 발목은 너무 굵다고 생각한다. 모델이나 배우들도, 너무 예뻐서 아무 걱정이 없을 것 같은 여자도 항상 걱정한다.

"당신의 통통한 엉덩이를 사랑해. 이런 통통한 엉덩이를 만들기 위해 당신이 먹은 모든 음식들도. 냠냠!"

그가 내 엉덩이를 깨물었다. 이런 식인종 같으니라고!


p.255

"이대로 떠나버리면 그를 잃을 거야."

"그럼 베넷은 당신이 가질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

"그게 무슨 뜻이야?"

"그렇잖아. 만약 베넷이 떠난다면 베넷은 어차피 당신 남자가 아니었어. 만약 당신을 다시 받아주면, 그건 새로운 시작이 되겠지. 더이상은 서로에게 아첨할 필요가 없겠지. 죄책감으로 서로를 조종하려 하지도 않을 거고. 어쨌든 당신은 하나도 잃을 게 없어. 더구나 그동안 우리는 아주 멋진 시간을 갖게 될 거야."


p.261

"응. 하지만 난 당신이 날 따분하게 하는 게 좋아. 다른 사람이 날 재미있게 해줄 때보다 더 재미있거든."

"우리가 나누는 대화의 흐름이 좋아. 당신을 감동시키려고 노력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걸 뭐든 다 말할 수 있으니까."


p.269

"헛소리하고 있네. 당신은 사랑을 말하지만 사실 당신이 말하는 건 안전이야. 그런데 사실 이 세상에 안전이란 존재하지 않아. 만약 당신이 안전한 남편과 함께 안전한 집으로 돌아간다 해도 당신 남편은 이튿날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고 다른 여자하고 눈이 맞을 수도 있고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될 수도 있어.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있나? 운명을 예측할 수 있나? 당신이 생각하는 안전이 정말 안전일까? 확실한 건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당신한테 이런 기회가 없을 거란 거야. 죽음만이 확실하지. 어제 당신이 말한 것처럼."


pp.276-277

정신분석이니 자기분석이니 그들이 했던 얘기들은 순 헛소리였다. 그들의 삶에서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사건에 직면했을 때 그들은 그 사실을 얘기조차 할 수 없었다. 타인의 삶은 얼마든지 분석할 수 있으리라. 누군가의 동성애적 욕망, 누군가의 오이디푸스적 삼각관계, 누군가의 간통은 분석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정작 그들 자신의 경험 앞에선 모두 할 말을 잃었다.


p.319

"가장 나쁜 건 당신이 항상 당신의 삶을 평범하게 만들려고 애쓴다는 거예요. 정신분석을 받는다고 해도 당신의 삶은 결코 단순해지지 않아요. 왜 그렇게 되기를 바라죠? ...(후략)"


p.343

나는 자존심이 있는 여자라면 뒤도 안 보고 달아났을 남자를 만났고 온갖 기이한 성향 속에서 뭔가 사랑스러운 걸 발견했으며 광기 속에서 엄청나게 매력적인 무언가를 발견했다. 에이드리언은 그 대목을 재미있어했다. 물론 그는 내가 만났던 정신병자 집단에서 그 자신을 제외시켰다. 그 자신도 어떤 패턴의 일부일 거라는 생각을 그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당신이 만난 남자들 중에 분류할 수 없는 남자는 오직 나 한 사람뿐이군!"


p.401

찰리와 그의 하버드 장애물. 그는 올 C학점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변변치 않은 바너드 대학에서 최우수 학생 클럽에 속해 있었던 나보다 자기가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버드에서 자신이 정제되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하버드 출신이었으니까.


pp.437-438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어쩌자고 이곳에 와서 쉬겠다는 생각을 했냐고. 나는 다시 떠나고 싶어졌다. 문득 내가 인간 탁구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으로부터 떠나려고 남자를 찾고 남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가족을 찾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다시 떠나고 싶고 떠나는 순간 다시 집에 돌아오고 싶다. 도대체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하나. 존재론적 딜레마? 여성 억압? 인간의 조건? 전에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지금도 견디기 힘들다.


p.488

FEMMES! LIBERONS-NOUS! (여성들이여! 스스로를 해방시켜라!)


p.490

우리는 다시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첫 번째 단계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루어진 두 번째 단계의 사랑이다. 두 번째 단계의 사랑은 절망적으로 사랑에서 멀어져가고 있음을 느끼고 그 사랑을 잃는다는 생각을 견딜 수 없을 때 시작된다.

우리는 더 이상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어느덧 우리의 연기와 하나가 된다.


p.502

그러나 나는 에이드리언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에겐 나를 구원할 의무가 없었다. 나는 이제 그 누구의 아기도 아니었다. 해방된 여자. 완전히 자유로운 여자. 그건 내 평생 겪은 그 어떤 경험보다도 두려웠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견디어야 할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가 날 구원해주리라는 기대를 버린 순간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아이가 아니었다.


pp.507-509

그러나 이제 나는 혼자 있고 싶었다. 만약 누군가가 내 상황을 잘못 해석한다면 나는 야생 짐승이 되어 반격할 것이다. 심지어는 심리학을 공부했고 남다른 통찰력을 지닌 베넷조차도, 내가 남자들에게 끊임없이 '접근 가능' 메시지를 보내기 때문에 남자들이 날 유혹하려 하는 거라고 말했다. 내가 옷을 너무 섹시하게 입어서. 혹은 머리가 너무 단정치 못해서. 아니면 그 무엇이라도. 한마디로 말해서 그런 공격을 당해도 싸다는 것이었다. 그건 이성간의 전쟁과 관한 오래된 독설이었고 가면을 쓴 구시대의 언어였다. 강간이라는 건 없다. 너희 여자들이 원한 것이다. 너희 여자들이.


왜 여자가 남자를 거부하면,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거절하면, 남자는 여자가 예의상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남자가 '노'라고 말하면 그것은 노이다. 여자가 노라고 말하면 그것은 '예스'이거나 적어도 '아마도'이다. 그런 걸 두고 하는 농담도 있지 않은가. 조금씩, 조금씩, 여자들은 여자에 대한 그런 편견들을 믿기 시작한다. 결국 그런 편견의 그늘에서 수 세기동안 살아온 여자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 어떤 일에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남자들은, 물론 여자들의 그러한 우유부단함을 조롱하고 그 모든 걸 생물학적인 문제, 호르몬 문제, 생리전증후군 탓으로 돌리고 그들의 약점을 공격한다.


p.539

'여성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늘 남성들의 여성관에 맞추려 애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D.H.로런스


p.569

나는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똑같았다.. 허벅지가 만든 분홍빛 V. 곱실거리는 음모의 삼각형, 마치 헤밍웨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물 위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는 생리대 끈. 하얀 배, 반쯤 물 위에 내놓은 젖가슴. 뜨거운 물에 장밋빛이 된 젖꼭지. 멋진 몸. 내 몸. 내가 갖기로 한 몸.

나는 나 자신을 끌어안았다. 사라진 건 바로 내 두려움이었다. 지난 29년 동안 가슴속에 넣고 다녔던 차가운 돌들이 사라졌다. 갑자기 사라진 건 아니었다. 어쩌면 영원히 사라진 게 아닐 수도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사라졌다.



http://jisus.tistory.com/183

벨훅스의 행복한 페미니즘을 읽고 낙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간단하게나마 정리해야지.

위키 페이지에 의하면



낙태법(落胎法, 영어: Abortion law)은 합법적 낙태의 요건과 절차를 정한 법률을 말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이를 모자보건법에 규정하고 있다.


현재 임신부의 요청에 따른 낙태를 허용하거나 처벌하지 않는 나라는 60여개국이며, 사회경제적 사유가 있을 때에 낙태를 허용하는 국가는 10여개국이다. 반면, 바티칸 시국, 몰타, 칠레,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등 5개국은 낙태를 예외없이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낙태에 관한 국가별 입장


  • 임신부의 요청 시 합법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몽골, 베트남, 캄보디아, 싱가포르, 네팔, 터키, 호주, 독일·프랑스·스페인 등 대부분 유럽 국가, 러시아 등 구 소련 국가, 튀니지, 남아프리카공화국, 미국, 캐나다, 멕시코, 쿠바, 우루과이 등
  •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 임신부의 생명, 신체적·정신적 건강, 사회경제적 이유 시 합법 : 일본, 중화민국, 인도, 영국, 핀란드, 아이슬란드, 잠비아 등
  • 성폭행, 근친상간, 임신부의 생명, 신체적·정신적 건강, 태아의 결함 이유 제외하고 불법 : 대한민국, 뉴질랜드, 폴란드, 콜롬비아 등
  • 성폭행, 임신부의 생명, 신체적·정신적 건강 이유 제외하고 불법 : 태국, 인도네시아, 아일랜드, 브라질,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페루, 파라과이, 도미니카 공화국 등
  • 임신부의 생명, 신체적·정신적 건강 이유 제외하고 불법 : 필리핀, 모나코, 서남아시아 및 북아프리카의 대부분 이슬람 국가
  • 예외없이 불법 : 바티칸 시국, 몰타, 칠레,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대한민국의 관련 규정


형법

제269조(낙태) ①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②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어 낙태하게 한 자도 제1항의 형과 같다.

제270조(의사 등의 낙태, 부동의낙태) ① 의사, 한의사, 조산사, 약제사 또는 약종상이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어 낙태하게 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모자보건법

제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① 의사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되는 경우에만 본인과 배우자(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의 동의를 받아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

1.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2.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3. 강간 또는 준강간(準强姦)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4.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된 경우

5.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② 제1항의 경우에 배우자의 사망·실종·행방불명, 그 밖에 부득이한 사유로 동의를 받을 수 없으면 본인의 동의만으로 그 수술을 할 수 있다.

③ 제1항의 경우 본인이나 배우자가 심신장애로 의사표시를 할 수 없을 때에는 그 친권자나 후견인의 동의로, 친권자나 후견인이 없을 때에는 부양의무자의 동의로 각각 그 동의를 갈음할 수 있다.

제28조(「형법」의 적용 배제) 이 법에 따른 인공임신중절수술을 받은 자와 수술을 한 자는 「형법」 제269조제1항·제2항 및 제270조제1항에도 불구하고 처벌하지 아니한다.

모자보건법 시행령

제15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① 법 제14조에 따른 인공임신중절수술은 임신 24주일 이내인 사람만 할 수 있다.

② 법 제14조제1항제1호에 따라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은 연골무형성증, 낭성섬유증 및 그 밖의 유전성 질환으로서 그 질환이 태아에 미치는 위험성이 높은 질환으로 한다.

③ 법 제14조제1항제2호에 따라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는 전염성 질환은 풍진, 톡소플라즈마증 및 그 밖에 의학적으로 태아에 미치는 위험성이 높은 전염성 질환으로 한다.




아니 태아의 생명권을 존중한다면서 모 아니면 도여야지, 이럴 땐 허용하고 저럴 땐 허용 안 하는 건 뭐임.

이거 거의 우생학, 막 뭐랄까, 그런 거 아닌가? (정리를 못하겠네)

장애를 가졌으면 생명권을 존중해줄 수 없고, 

강간으로 생긴 아이이면 생명권을 존중해줄 수 없는 거잖아.

생명권이 뭐 이리 아무렇게나 주어지고 안 주어지고 해?


태아의 생명권은 인권보다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하면서 (여성의 인권보다)

또 하찮은 이유로 인권보다 더 못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아니 하나만 해야 할 거 아니야, 하나만.



그러므로 저는 낙태를 지지합니다, 엣헴-

행복한 페미니즘 - 벨 훅스



목차


1장 페미니스트 정치학

2장 의식화

3장 자매애는 여전히 힘이 세다

4장 비판적인 의식을 키우기 위한 페미니스트 교육

5장 우리의 몸, 우리 자신

6장 아름다움과 안과 밖

7장 페미니스트 계급 투쟁

8장 전지구적 페미니즘

9장 여성과 일터

10장 인종과 젠더

11장 폭력을 종식시키기

12장 페미니스트 남성성

13장 페미니스트 부모 되기

14장 자유로운 결혼과 파트너십

15장 페미니스트 성 정치

16장 완전한 기쁨

17장 다시 사랑하기 위하여

18장 페미니즘과 영성

19장 페미니즘의 전망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더니

알라딘에는 품절 도서라고 뜨네.

그래도 요즘 페미니즘 관련 도서가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는 느낌이니까

재발간 되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해봅니다. 에헷.

(근데 출판사가 잘 모르는 곳이네.. 요즘은 어린이 책 위주로 가는 곳인가?)


꽤나 급진적이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은 본래 급진적이기 때문!


천천히 이 책에서 메모한 내용을 옮기며 썰을 풀어야짓

( ->나 * 같은 특별 기호는 내가 책을 읽으며 메모한 것 /내 생각/)




이 책에서 정의하는 페미니즘

: 성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


p.39

페미니즘은 반성차별주의이다. 남자라는 특권을 포기하고 페미니스트 정치학을 선택하는 남자라면 우리 투쟁의 귀한 동지이지 절대 페미니즘에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다. 반면 페미니즘 운동을 오염시키는 성차별적 사고와 행동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여자야말로 위협적인 존재인 것이다.


p.47

여성들이 다른 여성들을 지배하기 위하여 계급 혹은 인종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한, 페미니스트의 자매애는 결코 온전히 실현될 수 없다. (중략)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가부장제적 전제는 그 여자들이 다른 여자들과 맺는 관계 또한 규정했다.

-> 페미니즘을 의식화하고 실천하는 것이 나의 '여성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남성의 언어로 말하지 않기. 그 사회의 언어를 쓰지 않기. 계급, 인종 차별도 하지 않고, 나의 경우 고학력자에 속하게 되는데 저학력자들에 대한 나의 시선이 폭력적이지 않은지 항상 점검해봐야겠다. '지배하려 들지 않기'.


* 이 책은 페미니즘의 학문화되어 운동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경계한다.

p.62

우리가 비판적인 시각으로 경계하기를 게을리 하는 순간, 성차별주의는 언제라도 다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 안전하고 싸고 자유로운 낙태의 권리 (재생산의 권리)

-> 페미니즘은 정치적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에서는 낙태를 지지할 수도 지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페미니즘을 인정하지 않는다. 낙태는 권리가 되어야 한다. 여자가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내 몸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지 못하다니. 나와 태아에 대해 아무런 것도 모르고 아무런 권리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알량한 도덕, 생명존중 등을 내세워 나의 선택의 자유를, 내 몸을, 내 미래를 억압한다. 불평등. 

페미니즘은 역시, 낙태를 옹호하고 그 권리를 여성들에게 합법적으로 누리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페미니즘은 정치적이어야 한다.


p.74

여자의 선택권에 반대하는 운동은 근본적으로 반페미니즘적이다.


p.152

보수적인 매스미디어는 끊임없이 페미니스트 여성들을 남성 혐오주의자로 재현했다. 그리고 페미니즘 운동에 그런 반남성적 분파나 정서가 있었을 때, 매스미디어는 페미니즘을 불신하게 하는 수단으로 그것을 집중 조명했다.


p.154

이런 남자들은 자기 자신을 남성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성차별주의의 희생자들이라고 정의한다. 그들은 엄격한 성 역할이야말로 자기들을 희생시키는 근원적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들이 남성성의 규범을 변화시키고자 할 때에조차 그들은 여자들에 대한 자기네들의 성차별적 착취와 억압에는 별반 신경쓰지 않는다.


p.155

페미니즘 이론이 남성성에 대하여 좀 더 해방적인 비전을 제공했더라면, 여성 운동이 반남성주의라면서 덮어놓고 외면해 버리는 일은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페미니즘 운동은 상당한 정도로 많은 여성과 남성에게서 외면당했는데, 그것은 우리 이론이 남자가 반성차별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뿐만 아니라 대안적 남성성은 도대체 어떤 것인지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페미니즘이 제시하는 남성성. 그게 명확히 없으니 지지를 받지 못했다. "비판보다는 대안"

근데 어떠한 남성성을 제시해 줘야만 하는가? 페미니즘이 여성들에게는 어떠한 여성성을 제시해주었나?

그냥 자유를 누리라고 하는데. 억압되어 있지 말라고.

남성에게도 똑같이 얘기해주면 안 되나? 당신을 억압하고 있는 남성성 (man-box)가 있다면 마음가는 대로 행동하라고.

'남자여서'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로 바꾸면 안 되나?

아니면 남성은 억압받는 위치에 놓여있지 않아서 대안적 남성성을 페미니즘이 제시해줘야하나?

페미니즘과 남성에 대해서는 아직 좀 더 공부해봐야겠다.


p.199

진정으로 해방적인 페미니스트 성정치학은 여성의 성적 주체성에 대한 긍정을 언제나 가장 중요시한다. 그러한 주체성은 여자들이 자기의 성적 신체가 다른 누군가에게 봉사하기 위해 항상 대기 상태로 있다고 믿는 한 생겨날 수 없다. 종종 직업 창부를 비롯한 여성들은 일상적 삶에서 성교를 재화와 용역과 자유로이 교환하면서 그것이 자기가 해방된 신분이라는 징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여자가 다른 방법으로는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어서 자기 몸을 팔게 될 경우 언제라도 그녀 스스로 자기 몸의 주인이 되는 성적 주체성의 공간을 몰수당할 위험에 처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p.235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교회는 성이 평등하게 대접받는 쪽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성과들을 폐기하기 시작했다. 종교적 근본주의의 발흥이 진보적 영성을 위협하고 있다. 근본주의는 불평등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믿게끔 조장할 뿐만 아니라,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통념을 영구화한다. 재생산 권리에 대한 근본주의의 공격 또한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종교적 근본주의는 다양한 형태의 성적인 강제를 정당화하는, 섹슈얼리티에 관한 억압적 관념을 여성과 남성에게 강요한다.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제도화된 종교를 주목하고 비판과 저항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일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사실은 이로써 명백해진다.


pp.245-246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성차별적 지배와 억압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운동이며 젠더 차별을 종식시키고 평등을 창출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을 끌어안는 투쟁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급진적인 운동이다.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모든 방면에서 성차별주의에 도전한다는 대전제에서 자꾸만 물러서고 개혁에만 초점을 맞출 때 페미니즘 고유의 급진성에는 혼란이 발생한다. 수많은 '페미니즘들'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파워 페미니스트'라는 용어를 사용한 최초의 집단이자 특권적 계급 권력을 추구한 보수파와 자유주의자 여성들의 정치적 이해에 봉사했다. 그들은 또한 페미니스트 낙태 반대론자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제시하기 시작한 집단이기도 했다. 이것은 또 하나의 그릇된 개념이다. 여성에게 자신의 몸을 통제할 공민권을 허여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기본적인 원칙이다. 여성 개인이 낙태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순전히 선택의 문제이다. 우리가 낙태를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고 해서 반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성이 선택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페미니즘의 원칙이다.



주옥같은 문장들이 많지만 몇몇 문장들만 발췌하여 적었다.

기본적으로 내가 이 책을 통해 깨달은 점은


1. 페미니즘과 계급.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서 고통 받는 내가, 계급적 차이를 이유로 그 고통을 나보다 어려운 이들에게 똑같이 주고 있지는 않은가. 

페미니즘은 기본적으로 성평등을 추구하지만 더 넓게는 인간 사이의 평등을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계급, 혹은 물질적, 교육적인 차이를 이유로 다른 사람을 불평등하게 대하거나 무시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한 선민의식 가지지 않기. 

남성의 (지배적인) 언어로 말하지 않기. 

계급주의를 타파하기.


2.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 (그로 인해 발생되는 페미니즘과 정치 이슈)

이 책은 낙태에 대한 권리를 강하게 옹호한다. 낙태를 하고 안 하고는 여성의 온전한 선택에 기초한다.

낙태에 대한 권리는 여성에게 주어져야 하고 여성은 주체적으로 낙태를 선택한다.

자신의 몸에 대한 당연하고도 당연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여성이 참 많다.

언젠가 그런 글을 본적이 있다. 

보통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강간에 의한 임신 중절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 경우에는 태아의 생명권이 우선시하지 못하는 것? 이라는 요지였다.

결국 낙태를 반대하는 이유는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것보다는 '여자가 몸가짐을 똑바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처벌의 목적이 더 두드러지는 것 아닌가.


-> 낙태법에 관하여

http://theme.archives.go.kr/next/rule/sub4_2_07.do

https://ko.wikipedia.org/wiki/%EB%82%99%ED%83%9C%EB%B2%95


잘은 몰랐는데 낙태를 하면 형법으로 벌을 받네.

헐. 낙태했다고 징역 살아야 한다니. 


제269조(낙태) ①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을 때까지!

페미니즘이 가야할 길은 아직 멀다!




오늘 ize에서 LGBT를 지지하는 기업들에 대한 글을 읽었다.

http://ize.co.kr/articleView.html?no=2016022810067246661


"가장 뚜렷한 이유는 물론, 시장성이다. LGBT 시장의 규모는 매해 8천억 원 이상으로 추산되며, 성소수자들의 가계소득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23% 높다거나 자가 소유 주택 비율 역시 높고, 여행이나 스마트폰 등 소비에 좀 더 적극적이라는 통계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게다가 LGBT 그룹의 경우, LGBT를 지지하는 기업에 대한 충성도가 무려 74%에 달한다. 그렇지 않은 소비자들의 충성도가 42%인 것과 비교(ABC 뉴스)하면 엄청나게 높은 수치다. 성소수자들의 높은 구매력과 충성도는 기업에 차츰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여성 인권에 대해서도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업은 시장 논리에 따라 움직이니까.

여성 인권을 지지하는 기업의 제품을 구매하고, 재구매하고.

여성에 대한 말도 안 되는 광고를 만드는 기업들의 제품에 대해서 보이콧하고.

여성에 대한 혐오를 광고로 표현하는 기업들에 대한 정보는 메갈리아 측에서 그 때 그 때 (광고가 공개될 때마다) 제공하는 것 같다.


나도 알게 되는 기업 목록이 있다면 공유해야지!

최근에 알게 된 기업이랄까 회사랄까는 MAC 정도.

맥 제품은 아직 사본 적이 없지만 앞으로도 영영 사지 말아야지.


친구와 함께 백화점에 갔을 때 그나마 맥 립이 싸단 이유로 친구는 맥에서 립을 구입했는데,

역시 난 잠깐 발라본 샤넬 립글로즈가 그렇게 마음에 들더라니...

역시 샤넬인가...


움직이자, 여성들이여!

당신의 지갑을 함부로 열지 마시길 :D



얼마 전 아는 분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다.


A라는 교수가 있었는데 뭐 도의적으로 하면 좋지 않은 일을 했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B라는 사람이 '뭐 그런 여자가 다 있어' 라는 말을 했다.


아주 간략하게 적은 것이긴 한데.

내가 들어도 A라는 사람은 도의적으로 좋지 않은 선택을 했다.

하지만 내가 불편하게 들은 건 B라는 사람의 발언과 혹은 그 발언을 옮긴 아는 분이다.

(정확히 B가 뭐라고 했는 지는 내가 모르니까- 아는 분 혹은 B의 문제?)


뭐 그런 여자가 다 있어


평범하게 쓸 수 있는 말이다.

뭐 그런 남자가 다 있어. 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근데 A라는 사람이 남자였으면...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B라는 사람이 '뭐 그런 사람이 다 있어' 라고 말했을 것 같다.


되게 사소한 차이다.

프로불편러가 되어야만 알아들을 수 있고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차이.


'뭐 그런 남자가 다 있어'라는 말을 언제 쓸까 생각해보니

아마도 남녀사이에서, 그러니까 특정하게 남자의 역할이 요구되는 관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남자가 여자를 두고 바람을 피웠다, 그럴 때 친구들이 '뭐 그런 남자가 다 있어'라고 하겠지.


근데 이번 경우처럼 A라는 교수가 똑같은 일을 했을 때

B라는 사람이 '뭐 그런 남자가 다 있어'라는 말을 했을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거든.


그러니까 역시 프로불편러의 일은 이런 것 같다.

불편하게 느끼고 말하는 것.

왜 불편한 지를 생각하고 혹시나 불평등이나 잘못된 인식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 


.


그리고 또 더 나아가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남자애들끼리도 서로 욕을 할 때 '미친년' 이런 식으로 욕을 한다고 알고 있다.

아마 더 욕하는 느낌이 들어서라고 했었나?

예전에는 그래도 미친년/놈 가려서 말했다면 지금은 미친년도 남자에게 욕으로 통한다.

똑같은 무게의 욕이 아닌 더 무거운 무게의 욕으로.


여기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성차별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에게 있는 성차별이 언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겠지.


.


요즘 바빠서 통 페미니즘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최근에 읽은 페미니즘 책 두 권 (행복한 페미니즘과 비행공포) 을 좀 정리해서 올리고 싶은데

다시 시간을 내서 서평을 올리도록 노력해야겠다.

(너무 오래되면 서평 쓸 수도 없어 ㅜㅜ 기억이 희미해지니까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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