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주 불쾌한 일을 겪었다.


남자친구와 나란히 학교에 있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이 계단은 우리 학교의 랜드마크로써 꽤 넓고 (8~10m는 되리라 예상) 꽤 높다.

거의 다 내려갈 때쯤 나는 어떤 남자를 발견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넓은 계단에서 하필 내쪽으로 오고 있었고

(그 계단에는 나와 내 남자친구만 나란히 걷고 있었다.)

'뭐지? 좀 가까이 오는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우선 내가 일직선으로 내려가고 있었고,

그 사람은 이제 계단으로 오던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내 옆을 아주 가까이 스쳐지나갔고,

손을 내리고 걷고 있던 나와 손등이 스쳤다.


우선 이 넓은 계단에서 하필이면 이렇게 가까이 스쳐지나가는 게 썩 기분이 좋진 않았으나 그냥 내려가려 했다.

그 남자는 올라가고 남자친구와 나는 내려오는데 남자친구가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쳐다봤다. 

나도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쳐다봤다.

그도 고개를 돌려 우리를 보았다.

남자친구에게 "아는 사람이야?"라고 물었다.

남자친구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상한 사람이네...'


사건 자체는 별 일 없었고 나는 성추행이라고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 찝찝하긴 했으나 일반적으로 불쾌하다고 느껴지는 신체 접촉 또는 성적 접촉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걸어가다가 스친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굉장히 이상하긴 하다. 그 넓은 계단에 우리밖에 없었는데 굳이 내쪽으로 와서 나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어떤 의도가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사람을 성추행범이라고 잡기에는 심증만 가득한 상태이다.)


찝찝하긴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수 있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성폭력이라고 인지하고 기분이 나빴던 것은

내 남자친구의 의도치 않은 2차 가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사건이 바로 벌어진 직후 남자친구가 나에게 그 사람이 내 다리를 쳐다봤으며 내쪽으로 걸어왔다고 했다.

그리고 왜 나에게 내쪽으로 오는 사람을 인지했냐고 물은 뒤, 인지했다고 대답하자 왜 피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이 때 굉장히 기분이 나쁘고 수치스러웠다. 


나는 우선 그 사람이 내 다리를 쳐다보았으며, 나에게 직접적으로 왔다고는 인지하지 못했다.

그냥 '왜 굳이 이쪽으로 오지?' 정도의 가벼운 마음이었달까.

그래서 우선 이 일이 일반적인 스침이 아니라 성추행임을 깨닫게 되었다.

단순히 손등이 스친 정도이지만 성적 의도를 가지고 내게 접근했다는 것이 소름끼치고 짜증났다.


그리고 왜 피하지 않았냐니. 

나는 내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나는 내가 걷는 길을 그대로 일직선으로 걷고 있었고,

피해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제 계단을 올라서기 시작한 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사선에서 걸어오고 있었으므로 계단의 어느쪽으로도, 적어도 나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내가 피하는 것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 사람의 시선을 내가 느꼈다면 기분이 나빠서 피했겠지.


밥을 먹으러 가던 도중 그런 일을 겪고,

밥을 먹은 이후에도 남자친구가 같은 질문을 했다.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고.

왜 피하지 않았냐고.

나는 이런 질문을 듣는 게 짜증났다.

안 그래도 '내가 오늘 짧은 바지를 입어서 그런가' 라는 생각이 들고

밥을 먹은 이후 걸어갈 때도 맞은 편에서 남자들이 걸어오면 '내 다리를 보고 있는 걸까'라는 피해의식이 생겨 불편했는데

마치 피하지 않은 나의 잘못인 듯 얘기하는 남자친구가 짜증났다.


나는 왜 네가 나를 피하게 하지 않았냐고 했다.

남자친구는 그 사람이 어떤 짓을 하는 지 보고 있었다고 했다. 

주시하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이것도 기분이 나빴다.

순전히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그 사람은 나를 스쳐지나갔지만

혹시 그 짧은 순간 나에게 성적 접촉을 시도했다면?

내 몸 어느 곳에도 손을 뻗을만한 거리였다.

나를 고스란히 피해 상황에 두고서 그 사람의 행동과 나의 반응을 보겠다는 셈이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더 심한 신체 접촉을 했다면 남자친구는 그 사람의 멱살을 붙잡고 한 대 칠 수 있었겠지.


그런데, 나는ㅡ?


직접적인 피해 대상이 되는 나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사람을 치겠다- 라는 생각은 순전히 자기 위주의 생각이다.

나를 고려하지 않고 '내 여자는 내가 지키겠다'라는 수컷의 싸움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럼 내가 '우와, 나는 지금 피해를 입었지만 내 피해에 화를 내주는 네가 참 멋져' 라고 해야하는 건가?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Thank God that the thing did not happen) 

나에게는 그 일이 트라우마로 남게 될텐데?



그 이후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왜 자꾸 내가 피하지 않았냐고 추궁하는 남자친구의 말이 짜증났다.

결국 남자친구가 자신의 2차 가해를 깨닫고, 나를 이해하고 사과를 하긴 했으나

이런 일들이, 즉 2차 가해가 성폭력 피해자에게 빈번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의식적이진 않지만 무심코, 배려없이 던지는 말들이 피해자에게는 그 사람이 의도했던 것보다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피하지 않았냐고 묻는 것은 나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일이다.

단순히 궁금해서라는데 성추행을 겪은 나에게는 너의 궁금증을 해소시켜줘야할 의무는 없다.

나에게는 그 일을 다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쁜데,

너는 너무도 배려없이 나에게 책임을 추궁한다.


너무나도 뻔한 2차 가해-

피해자에게 '왜 그 길로 갔니?', '왜 술을 마셨니?', '아니,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 건데, 물론 너를 추궁하는 건 아냐. 근데 그 길로 갔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어?'

이 세상에서 여자들이 살기란 쉽지 않다.

경계하면서 살아간다.

네가 밤길을 강도를 걱정하며 다니는 것보다 훨씬 더, 여자는 주위를 경계하며 다닌다.

나는 학교라서 마음을 놓고 다닌 것뿐-

그 길로 갔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 예상했으면 누구도 그 길로 가지 않는다.

범죄의 책임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물어야한다.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내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아니 성별은 큰 상관이 없나,

어쨌든 내가 당한 게 성추행이 아니라 일반적인 폭력이었으면?

그래도 나에게 같은 2차 가해를 했을까?

지나가던 사람이 내 쪽으로 걸어오더니 나를 때리고 지나갔다면,

그 때도 왜 내가 피하지 않았냐고 물어올까?

나에게 일말의 책임도 추궁하지 않고 가해자를 욕하지 않았을까?


성범죄는 참 이상하게도

피해자에게도 책임을 추궁하는 범죄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2차 가해에 둔감해져있다.


누군가가 아무리 패고 싶게 생겼어도 그 사람을 때리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누구도 맞은 사람을 욕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범죄는 그렇지 않지.

피해자의 옷차림, 음주 상태, 행동, 몸짓 등 많은 것에서 가해 이유를 찾는다.

피해자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특성들은 절대로 가해에 면죄부를 주지 못한다. 




어쨌든,

심하진 않았지만

직접 성추행을 겪고

그에 대한 2차 가해까지 겪었다.

그리고 2차 가해가 얼마나 손쉽게 이루어지는 가해인지 깨달았다.

남자친구도 나도 이제서야 2차 가해가 무엇인지 조금은 인지한 것 같다.

나 같은 경우엔 받았던 질문 자체도 기분 나빴지만 ("왜 피하지 않았어?")

질문을 받은 타이밍 자체도 굉장히 나빴다. 

일이 일어난 직후였으니까.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엔 단순히 상황을 물어보는 질문이라면 평범하게 받아줄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물론 나는 별 일이 아니었긴 하지만.



P.S.1.

남자친구가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요즘 페미니즘에 너무 빠져있어서 그런 것 아니냐고.

정희진 선생님의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라는 책에서 그 얘기가 나왔다.

성폭력 피해는 그 일을 묻고 있는 게 아니라, 다시 꺼내서 페미니즘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해야 

피해자에서 생존자가 되는 거라고. 


나는 페미니즘을 조금이나마 공부한 덕분에 이 일이 절대 내 잘못이 아님을 알고 있다.

사건 직후에는 내 반바지가 너무 짧은가- 앞으로 이 바지를 못 입으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떨쳐냈다.

나의 옷차림에는 문제가 없다.

성폭력의 이유는 피해자에게 있지 않다.

내가 나를 스스로 비난하고 내가 피하지 못했음을 슬퍼했으면 나에게 이 일은 어떠한 트라우마로 남겠지.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나의 옷차림에는 문제가 없었고, 나의 행동에는 문제가 없었다.

나에게 오는 그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고,

그 사람이 내게 오는 데도 내가 피하지 않은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그 사람이 내게 성추행 시도를 한 것은 나에게 원인이 있지 않고 그 사람에게 원인이 있다.

이 모든 게 내가 페미니즘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텍스트 독해이다.

같은 텍스트를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나는 스스로를 질타할 수도 있고 당당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당당하기로 선택한다.



P.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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